Extraordinary Everyday!

3월 1일은 날도 춥고 비가 와서 가려다가 못간....
천안 독립기념관을 3월 7일이 되어서 가게 되었다.


10시 04분 기차를 타고 천안으로 갔다. (수원역에서 천안까지 새마을호는 5200원)
천안까지는 30분 정도 소요, 37분인지 39분에 도착한 것 같다.
기차 안에서는 군고구마도 먹으면서...
(다음엔 열차카페도 이용해봐야겠다
맥주 한캔과 오징어. 아흥.... )
아무튼 가져간  삶은 계란과 사과까지 먹기에는 배가 불렀다.


그리고 도착한 천안역
예전에 두어번 와봤지만, 터미널에 비해 인적이 드문 모습이었다.
천안역에서 택시 승강장쪽으로 가면, 즉 우측으로 가면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그곳에서 독립기념관을 가는 400번 버스를 탔다.
천안도 도착시간 서비스를 해주어서 버스 기다리는데 초조함은 없었다.
단 행선지를 나타내주는 알림판이 둥그스름하게 생겼는데, 살펴보는 데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버스카드의 지역 마이비 카드가 없어서 1인 1200원을 냈다.
표시에 kb카드라고 적혀있길래 갈 때 찍어봤더니, 잘만 찍혔다... 진작에 물어보고 탈걸;;;;

아무튼 한 25분 정도  버스가 퉁퉁대더니 독립기념관에 도착했다.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찾아본 사이트는
http://www.independence.or.kr/NEW/index2.html
라서 깜짝 놀랐다. 아니 이렇게 허술하게 해 놓느냔 말이더냐? 하면서 나름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부끄럽다.
(이 곳은 입장료의 표기도 성인 2000원으로 나와있다. 예전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무료이다.)

http://i815.or.kr/KO/index.php (진짜 사이트)
독립기념관 사이트는 이거다. 아무래도 위 사이트는 폐쇄되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이 사이트를 지금에서야 가보니 참 잘 만들었다 ^-^


넓직한 광장과 겨레의 탑을 지나 오른쪽에 광개토대왕비를 그대로 복제한 것이 마련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웅장했던 시기, 광활했던 시기, 그 정기를 살펴볼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중국에서 야욕을 보이니;;;;;

아무튼 그 다음에는 안중근 의사께서 하얼빈 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총살하는 사건을 재현하는 야외 전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 정부의 애국지사에 대한 고문행위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물이 있었다.
아저씨들은 '저게 고추가루물로 만든거네!' 하셨지만;;;;;
어렸을 때 독립기념관에서 경험했던 그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팠다.

겨레의 집에 들어서기 전에는 몇백개의 태극기들이 펄럭이고 있어 감동의 물결이었다.
하나의 태극기가 아닌 수백의 태극기의 행렬의 모습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거대 석조물이 있는 겨레의 집을 지나 각 전시관으로 향했다.

(멀리서 겨레의 집을 봤을 때 아쉬웠던 것은 대부분 기와집을 살펴볼 때 지붕이 참 넓직한 부채꼴 무양인데 반해,
겨레의 집의 기와지붕은 뭐랄까? 비유를 하자면 '어좁이' 형태를 띠는 것 같았다.;;;) 아, 한국 전통기와집에 대한 용어에 문외한이라;;;

<왼쪽이 독립기념관 기와 형태>,< 오른쪽은 일반 한옥 기와형태>

왼쪽부터 1전시관이 있었는데 1전시관은 아쉽게도 보수 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특별전시관도 8월 15일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라 살펴볼 수 없었다.

제2전시관은 <겨레의 시련> - 사이트 설명-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상품화폐경제가 급속히 발전해 간 반면 자립적 발전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정보와 민중들의 개혁운동이 좌절되었고, 1910년 강제병탄 이후 일제는 경제적 수탈과 함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감행하여 우리민족을 말살하고자 하였다.
이 전시관에는 개항기 거리 모습 및 을사늑약 체결 모형과 일제침략 만행, 우리의 영토인 독도, 간도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 예전 교과서에서는 '을사조약'이라고 나와있었는데, 이제는 조약이 아닌 '늑약'으로 바뀌어있다.
늑약당시 이완용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남친은 이완용이 어떻게 변절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하고 형장에서 사라져버린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려고 했고;;;
조국을 위해 정의로운 활동을 선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선택했던 것 같다.

여기서 나와서 편의시설이 있는 곳에서 삶은 계란과 구입한 어묵을 먹었던 것 같다. 어묵은 편의점에서 2000원에 파는 건데, 그곳도 2000원에 팔더라. 바가지가 없어서 다행, 너무 고마움.. ㅋㅋ ^-^

제3전시관은 <나라지키기>
일제의 참략 야욕이 본격화되자 우리 민족은 나라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의병으로 봉기하였고,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전쟁은 거족적인 항일무장투쟁으로 확대 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힘을 기르고자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자주독립과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열망과 애국지사들의 항쟁은 대한민국 수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전시관에는 의병전쟁 및 숭고한 애국정신과 국권수호를 위해 살신성인한 애국선열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 일제에서는 단체결성을 금지했기 때문에 각 종교단체를 통한 항일 운동 및 생활전선에서 수탈을 참을 수 없었던 농민들의 의병전쟁 등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나아가 우리 겨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조상분들께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기억나는 분은 호랑이 가죽 조끼를 입고 계셨던 '신돌석' 의병장 ^-^..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


제4전시관은 <겨레의 함성>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 1일 총궐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해외동포들까지 참여하여 민족의 독립 역량을 온 세계에 과시하였다. 그리고 중국, 인도 등의 약소민족에게도 영향을 주어 5·4운동 등의 투쟁이 일어나게 하였다. 이 전시관에는 1910년대 국내외 독립 운동과 3·1운동 관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 우리 나라처럼 이렇게 큰 독립 운동이 일어난 곳은 없다고 한다. 게다가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에까지 전해졌으니....이집트, 인도,... 중국 등... 아무튼 프랑스 혁명을 본 받고,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원칙을 기반으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전국각지에서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다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요즘이야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정보 전달이 될테고, 촛불시위나 플래시 몹을 하거나 할텐데,
그 당시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라는 속담아 존재할터, 어떻게 그렇게 정말 '삽시간'에 퍼질 수 있었는지..
그만큼 독립에 대한 염원이 절실했던 것이 아닌 가 싶다.
아쉽게도 지식인 층 33인의 ... 4명이 불참한 29명의 독립선언문 낭독이 왜 하필이면 '태화관'... 요정이고, 이전 이완용이 살았던 곳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정말 의문이다.
어쩌면 '허를 찌르는 장소'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슬슬 눈치를 채갈터라, 각 인사들의 집 주변은 '집결지'로 예상이 되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누가 신고를 했는지, 그 누군가의 신고로 태화관에 있던 각 인사들은 고스란히 잡혀갔다고 한다.

제5전시관 <나라 되찾기>
만주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미주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군 관련 자료, 한국광복군과 의열투쟁에 관련된 각종 자료와 모형물, 영상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국외에서 활동했던 무장독립투쟁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안에서도 독립운동이 이루어졌지만, 내부에서의 전쟁활동을 할 수록 일본들은 더 몰아쳤을 거다. 퇴각을 하면서도,... 그리고 이전에 뿔뿔이 흩어졌던 만주, 연해주,... 등에서의 독립군 활동을 살펴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면서, 독립을 위해 외국까지가서 활동을 전개한 분들.

제6전시관 <새나라 세우기>
제6전시관인 사회문화운동관에서는 각계 각층의 민족운동을 전시하고 있다. 문화운동실에서는 어문, 문학, 역사, 언론, 출판, 교육, 종교, 예술 등 각 분야에서 전개한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시하고 있으며, 사회운동실에서는 여성, 소년,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등 각 계층의 항일운동을 전시하고 있다. 사회문화운동은 대외적으로는 민족문화말살의 위기에서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회복하고 보존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이민족의 지배로부터 독립해 자유를 쟁취하고 분열과 차별, 억압에서 벗어나 평등한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투쟁하였다.

- 출판, 영상물을 통한 계몽 운동 및 항일운동 관련 기사를 널리 알린 신문들, 그곳엔 경향신문 창간 내용도 있었다. ^-^


사실 여기부터는 남자친구와 독립 후 정부의 태도에 대한 이해 측면에서 논쟁을 하는 바람에;;;;; 잘 못봤던 것 같다.

박정희 정권에서 패전국 일본한테 원조를 받은 것에 대해서,
부국강병을 위한 경제살리기를 주장하는 남친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측면과

그래도 말이 안된다, 그것 때문에 현재 일본과의 영토문제, 위안부 문제등 여러가지가 흐지부지한 상태가 아니냐? 거부했어야 한다는 나의 의견에 대해서 말이다. 친일파 후손 땅의 환수 사항 측면도 그렇고;;;;;

하지만 그 당시의 선택이 지금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 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아무튼 남친의 경우는 그 당시 원조를 받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성장은 볼 수 없었을 것이라며, 그나마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나 됐으니,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정도'나 되는 것이라 한 것이고
민족 의식이 아무리 살아 있다 하더라도 나라가 힘이 없으면 사라진다...고.

나의 경우는 경제만 우선시 하다 보니, 역사 의식이 흐려진 현 사태의 원인을 이전 과거의 정부에서 찾은 것이다. 
나의 경우는 미국의 정복역사보다 인디언의 공동체 의식을 높이 평가하는 바다. 

아무튼 이쯤에서... 끝내고.

입체영상관에서 '도토리 훈장'이란 4D 영상을 보았다.
4D입체영화「도토리 훈장!」은 “청산리 전투”를 모티브로 하여 픽션을 가미해 제작한 영상물로서, 2008년 현재를 살고 있는 초등학생 한얼이가 타임슬립을 통해 독립군인 증조할아버지를 만나 독립군의 전투를 직접 목격한다. 그리고 지금의 할아버지가 어린시절 독립군이 된 아버지(증조할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리워하며 만든 도토리훈장을 전해주며 광복의 소중한 꿈과 나라사랑 정신, 가족애 등을 시간여행을 통해 보여준다.
특히 독립기념관이 어린이와 청소년층 관람객을 대상으로 의욕적으로 개발한「도토리 훈장」관람은 특수안경을 착용하고 보는 입체영상물이다. 또 극중 장면에 따라 관람객들에게 의자(160석)를 통한 진동과 바람 등 다양한 연출효과가 직접 전해지도록 설계되어, 흥미롭고 즐겁게 그날의 항일역사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역사의식과 나라사랑 정신을 뜨겁게 느껴볼 수 있다.


으흐흐흐흐 ^-^ 
마지막 엔딩 자막이 마음에 든다.
다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보시라. ^-^

상영은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점심시간인 12시와 13시 사이에 30분 사이의 영상만 없고...
각각 30분 간격으로 상영이 된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쳤는데,
뭐랄까? 우리나라 조상님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독립이  햇살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층계를 내려오니 오른쪽 작은 터에 나름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 널뛰기를 해보았다. 아 생각보다 쉽지 않네.
3년 전 용인민속촌에서는 그래도 좀 신나게 널을 뛰었던 것 같은데, 세월 탓인지.. 아무튼 웃음이 나와서 웃다보니 자꾸
널 중간으로 몸이 향하고 있었다. ^-^

그리고 다시 왼편으로 가서 호수에 있는 대왕잉어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주는 뻥튀기 과자와 인디안 밥, 딸기웨하스가 그들을 그리 살찌게 만들었단 말인가?
색은 금붕어 색인데, 크기는 40센티미터가 다들 훌쩍 넘고 주둥이 지름만도 6센티는 넘으니 말 다했다.
물위로 주둥이를 오므렸다 폈다하면서 먹이를 기다리는 물고기들을 보니 조금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멀찌감치 백로 같은 새가 있었는데,... 아마 물고기를 먹고 싶어도 들어올리지도 못하고 입속으로 넣지도 못할 거란 생각이 드니, 그 새가 불쌍하다 싶었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문에서 나왔는데, 가족자전거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작은 전기자동차도 있고.. ^-^
마음은 타고 싶었으나 날도 춥고, 사진기도 없어서 패스 ^-^ 가족 자전거는 최소 8000원부터, 1인 자전거는 4천원....

그리고 병천순대를 먹고자 했는데
버스를 잘 타야 한다. 400번이 천안행이 있고, 병천행이 있다.
우리의 경우는 첫번째 버스가 천안행이었고, 10분 넘게 기다렸는데도 두번째 버스도 천안행이라;;;;
그냥 오는거 아무거나 타자 하는 바람에 천안역까지 왔다.

그리고 암울한 상권으로 바뀐 천안역 근처에서 순대국집을 살펴보다가 다시 아까 버스를 탔던 그 자리에서 병천가는 400번 버스를 타고 갔다. (개인 적인 맘으로는 천안 역 앞 지하에 위치한 지하상가와, 앞 왼쪽에 위치한 공설시장이 잘되었으면 한다. 진심으로)

병천은 거의 '종점'이다.
천안역은 거의 '시작점'이다.. 종점인 천안터미널과 4분정도 거리밖에 안되니;;;;;

그래서 천안역에서 병천까지 가는데 한 40분은 걸린 것 같았다.
과수원도 지나고, 한국과학기술대도 지나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병천우체국이 나온다.

거기서 내리던가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리던가 하면 그 주변이 다 '원조'를 자랑하는 순대국밥집이 나온다.

남친이 알아온 바로는 '청화집', '충남집'이 있는데,
사실 전화상으로는 '청화집'과 통화를 했다. 위치를 알까 하여.(너무 죄송해요;;;)
그런데 바로 맞은 편에 '충남집'이 있었고, 사람이 많아 보여서 그리로 갔다.

청화집의 경우는 예전 형태의 집을 리모델링해서 세련된 느낌이라서
오히려 마케팅 효과를 잃은 듯 했다.

대신 청화집의 경우는 옛날 그 자리에 위치했던 상점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간판 옆에)
(다음 번엔 청화집으로 가봐야지.. ^-^)

아무튼 충남집에 들어갔다.
메뉴는 순대국밥 5000원, 순대 접시 8000원.. 나머지는 다 주류, 음료수이다...-.-;;;

그래서 순대국밥 하나, 순대 접시 하나 시켰다.


'맛있게 먹었다...'
그랬다면 정말 어쩌면 우리에게 밋밋한 천안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웃지못할.. 
하지만 버스에서는 그 얘기하다가 멀미도 잊은, 웃느라 정신없었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사실 맛은 있었다.
양도 푸짐했다. 아주머니께서 물도 안 주고, 젓가락은 안 주고 숟가락만 줘도,
그리고 접시에서 바닥으로 몇개 떨어져서 '어머나!'하면서 가져가시곤 도로 안갖다줘도...
다 맛이 있기에 나름의 '카리스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순대를 오밀조밀 뜯어보며 '양배추'도 들어가네..라며 먹다 보니.
한 10센티 정도 되는... 쌀포대 자루라고 해야하나? 마대자루라고 해야하나? 하얀색 비닐끈이 순대 속에 길죽허니 꽂혀있었다. 폭은 0.3센티 미터 총 길이는 10센티 정도가 되는 자루의 '씨실'인지 '날실'인지 하는 것이 말이다.

이를 어쩌나? 싶어 여쭤보았더니 죄송하다며 새 접시로 갖다 주시겠다며 '홀랑' 가져가셨다.  
누구나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누군가에게 들키면 감추기 마련이니...뭐.

아무튼 식당의 관리자 분과 얘기를 했다.
우리가 먹었을 경우도 있기 때문에...
국물로 후루룩, 순대도 쩝쩝 하다가 정말 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곳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들의 경우는 어떠할지....-.-;;;

아무튼 죄송하다하시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이 실수도 하는게 당연하니...
일단 추후 있을 상황을 생각해서 명함을 받고,

순대접시에서 비닐이 나와서 음식값을 안받겠다고 하셨는데,
순대국 한그릇 계산만 하고 나왔다. 
앞으로는 위생을 더 철저히 하시리라 믿는다. ^-^


이후, 버스 안에서 남친과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이런 정황, 저런 정황에서 어떻게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수세미 조각이었으면 그냥 먹었을 거라는 둥, 의도한 것도 아닌데 뭐... 정말 배가 아프면 어쩌지?.. 등등)
그러면서 재미나게 천안역까지 왔고,

생활의 달인에 나왔다는 호두과자점에서 작은 봉지의 호두과자를 구입하고. ^-^
기차에 다시 몸을 맡겼다.

그런데 호두과자 참 실하고 맛나더라. ^-^ 앙. 
( 천안 호두는 호두가 정말 풍부하게 들어가는 것 같다. )

아무튼 신나는 하루 ^_^ ㅋㅋㅋ

ps. 파란색 바탕에 있는 내용은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데려온 내용이다.






 

2007년 9월 16일 일요일 오전 5시 30분 기상.
감지 않은 머리 질끈 묶고 고양이 세수.
저녁 늦게까지 싼 짐가방을 질질 끌며 버스 정류장 도착.
버스를 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빈 택시 한대를 보내며 마음만 더 조마조마 해짐.
결국 택시를 타고 안산 버스터미널 도달.
6시 20분에 출발하는 '인천공항 행' 버스 승차.
2시간 예정으로 적혀있던 시간표를 무시하고 8시 전에 도착.

만나기로 한 동행자들은 8시 30분 약속.
먼저 짐 부치고 발권함.
(기내 반입 물품 꽤나 삼엄, 화장품류, 칼등은 수화물로 부쳐야 함.
스킨, 로션, 향수, 생수도 기내 반입 안됨 -.-)

20만원 인출, 5만원 환전하여 15000원?(타이완 달라) 받음.

아차!.. 로밍서비스 받음, 10000원 보증금으로 충전기까지 얻음.(아싸)
발신시 현지는 1분단위 350원, 다른 나라로는 850원(우웨에에에엑)
수신시 746원, 문자메세지 수신은 무료, 발신은 건당 300원(허걱)
(고로, 로밍서비스 신청하면서 타 통신망을 이용하여 할인 혜택을 받아야 함, 안내해주시는 분은 별도로 말씀 안해주심 -.-)

동행자와 아침을 챙겨먹고 면세점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10시쯤 게이트에서 기다림.
기다리던 비행기는 연결이 되지 않아 10시 30분 출발이
11시로 바뀜.

대단히 죄송하다는 KE691 타이페이 편.. 대한항공.
'탑승 성공'

옆자리는 덩치 좋은 흰머리 외국인 아저씨.
군것질을 좋아하는지 내가 창문을 볼때
슬쩍 꺼내드시던 초콜렛 바와 땅콩 과자.

한시간 쯤 지나자 나온 기내식 점심. 해물 곁들인 밥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부를 모르시는 아저씨, 슬쩍 한번 드시곤 곧장  '콕' . 두어번. 외치심.
나는 빵은 얼른 가방에 넣음, 쥬스 대신 맥주 달라할 걸.. 조금 아쉬웠음.
사진 찍는 것이 부끄러워 비행기 뜨는 사진도 못 찍었네.
아효...

CBOL학회에 왔다. The 2nd Internationl Barcode of Life Conference
가 대만에서 열렸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 '영어'를 쓰는데 다들 '영어'를 어찌나 잘하는지
참으로 부끄럽고 부러울 따름이다.

컨퍼런스의 주최자는 캐나다의 겔프 대학이 되었고 그 중심에는 폴 에베르라는 70대 할아버지 교수가 있었다. 연구의 꽃은 노년에 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산타클로스 같은 흰 수염을 갖다 붙인 게 아닌 진짜로 기른 할아버지들이
수두룩했다. 간간히 빠박 머리 할아버지도 있었다. 백발 할머니도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분류학자들이 실종되어 가는 전세계적인 사태를 맞아 분자유전학적 방법으로 생물다양성을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가지 주제를 갖고 논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편 일주일동안 비슷한 주제를 줄줄이 듣다 보니,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간간히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생물다양성을 살펴본다고 전 세계 자연사 박물관에는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산림 속에서 잘만 살고 있던 나비들을 수천마리 데려와 표본으로 만들고, 다리 하나 떼어 DNA실험을 하며 북태평양 바닷가를 신나게 헤엄치던 물고기를 잡아 알콜에 풍덩 집어 넣고 실험을 한다는 것
어쩌면 이런 작업들이 '인간 중심의 지배욕, 집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의 학문적 호기심','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그런 것을 만들었고,
나아가 '자연의 보존, 지구의 평화'를 생각한 것이겠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형태분류에 한계를 느낀 분류학자, 더욱이 연구비를 지원 받을 수 없어 턱없이 부족한 분류학자들...이 자구책으로 내 놓은 것이 이번 학회의 시작이 되지 않은 것이가 싶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주일간 학회 일정 속에서 '나쁘게' 느낀 점이 이렇다는 것이다.